220125 며느라기 (2020)
※ 본 리뷰는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드라마를 다 보지 않은 분이라면, 유의해주세요.

01. 인스타툰으로 처음 접했던 '며느라기'. 사실 원작만 봤을 때도 하이퍼 리얼리즘의 이야기여서 혈압이 몇 번씩 오르락내리락했었는데. 이 작품이 드라마화 된다는 소식에, 또 얼마나 뒷목을 잡을지 몰라 처음 방영 당시엔 시청을 안 했었다. 무가네의 정말 입이 있어도 입이 없는 무구(無口)한 남편들을, 2D가 아닌 3D로 마주하며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도저히 이겨낼 자신이 없을 것 같아서(..)
02. 박하선 배우나 권율 배우의 스타일링은, 가히 만화를 그대로 빼다 박았다고 말해도 좋을 만큼 완벽하다. 특히 박하선 배우의 헤어스타일은, 정말 민사린 그 자체여서. 게다가 박하선 배우가 목이 꽤 긴 편이어서 그런 단발도 너무 잘 어울렸다! 보는 내내 사린이의 모습에 반한 구영이가 너무나 이해됨< 그나저나 한 1990년대 후반 즈음의 아련한 곡은, 김동률이 다 장악한걸까. 김동률 노래가 흘러 나오는 장면에서는 '건축학 개론'의 오마주를 보는 듯해서. 90년대 후반에 전람회나 김동률이 없었다면, 어떤 노래가 흘러 나올 수 있었을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신승훈이나 015B, 마로니에... 이런 쪽이었을까?
03. 무구영과 민사린은 아주 무난한 삶을 살았다. 대학을 나왔고, 취직을 했고, 연애를 했고, 결혼을 했다. 아주 보편적인 삶을 살았고, 보편적인 인생을 걸어왔다. 그리고 그들의 인생은, 결혼을 기점으로 조금씩 틀어지기 시작했다. 결혼은 무엇이든 '함께'라고 배워왔던 시간들 속, 무구영의 '함께'는 우리 가족과 우리 부부가 함께 라는 뜻이었고. 민사린의 '함께'는 우리 부부 두 사람이 함께 라는 뜻이었다. 같이 살고 있지만, 따로 살아온 시간이 더 긴 신혼 부부는. 서로의 가정 속 일원이 되는 것이 너무 어렵다. 물론, 상대의 인생의 반려자로 살아가게 되는 시간이. 누구에겐 더 어렵고 누구에겐 더 쉽다, 라는 절대 비교나 평가를 할 수는 없는 부분이겠지만. 적어도 이 안에서는 민사린이 더 어려웠다. 민사린은 제사를 지내지 않는 집의 외동딸이었고. 무구영은 제사와 명절을 북적북적하게 지내온 집의 둘째 아들이었다. 무구영에겐 모든 가족이 모였을 때, 남자들이 손 하나 까딱 하지 않는 것이 어색하지 않았고. 민사린에겐 큰 상을 두고 작은 상에서 여자들끼리 밥을 먹는 명절의 풍경이 낯설었다. 그리고 이 모든 낯섦과 어색함에 대해 누군가를 탓하기엔, 대상이 없었다. 시댁이 어렵고, 시댁이 불편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화를 낼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민사린은 무구영과 부부가 되었고, 그 사실은 곧 무구영의 식구들도 자신의 가족의 범주에 들어왔기 때문에. 이 상황에서 누군가의 탓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곧 가족을 탓하는 일이 되었으므로.
04. 우리는 모두 언제 어디서든 '미움 받을 용기'가 필요하다. 오죽하면 이와 같은 제목의 책이 스테디셀러 팔릴 만큼,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마음이라는 것을 우리는 다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실행하지 못한다. 사람은 미움을 받을 '용기'를 갖기 이전에, 사랑 받고 싶은 '욕구'가 더 강하게 밀고 올라오므로. 하지만 사린이는 조금씩 삐걱거리는 상황속에서, 아주 작게나마 미움 받을 용기를 택한다. 시어머니에게 지금 당장 미움을 받더라도, 시아버지에게 지금 당장 한 소리를 듣더라도. 더는 자신에게 생채기를 낼 수 없으므로. 나를 지키는 것이 곧, 구영이와의 내일을 행복하게 지켜나갈 수 있는 힘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05. 정혜린은 아주 칼 같은 사람이다. 아니라고 생각한 일에 대해 두 번 고민하지 않는다. 아닌 건 아닌 거다. 그런 마음으로 명절 자유권을 얻은 혜린. 원작 만화를 볼 땐, 사실 혜린이 조금 더 쿨한 느낌이었어서. 너무 좋지만 괜찮을까? 싶었는데. 드라마의 혜린은 원작 혜린만큼 칼 같지만, 그만큼 또 약간의 인간적임도 그려지고 있어서 좋았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원작보다 좋았던 캐릭터는 당연 정혜린. 정혜린 제발 이혼길만 걸어< 무가네 탈출 1호는 무조건 정혜린이 되어야만 해(진지)
06. 제주에서 만난 가구 디자이너는 사린이에게 말한다. 소나무는 상처를 입을 수록 솔방울을 많이 만들어 낸다고. 사린이라는 소나무는 얼마나 많은 솔방울을 만들어냈을까. 얼마나 많은 솔방울을 품으며, 겉으로 티나지 않는 상처를 자연치유해왔을까. 우리네 수도 없는 며느라기들은, 지금도 또 얼마나 많은 솔방울을 만들어 내고 있을까. 소나무는 어디에나 어울리지만, 어디에도 어울리지 못하는 예민한 나무라고 한다. 전국의 수없이 많은 며느리들은 지금도, 어디에나 어울리지만 어디에도 어울리지 못한 채 설이라는 명절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을 생각을 하니. 내가 다 아득해졌다.
07. 사실 이 시즌1을 오늘 다 보게 된 이유가, 현재 시즌 2(며느라기 ing)가 방영 중이라는 홍보를 봐서. 한 번 봐 볼까? 라는 마음으로 재생하게 된 건데. 현재 시즌2는 3화까지 방영 되었으며, 2화까지 본 나의 기분을 요약하자면.

적어도 시즌1 마지막 회와 시즌2 첫 회를 보며 품었던 무가네에 대한 희망은. 2화 만에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래도 우선, 혜린이부터 도망쳤으면 좋겠는데. 혜린이라면 가능할 것도 같았는데. 의외로 제일 먼저 이혼장을 내민 사람이 미영이라는 점이 놀라웠던 시즌1. 물론 철수가 손지검한 그 순간, 이혼장 안 내밀고는 안 될 전개이긴 했음. 그래놓고 시즌2에 무슨 낯짝으로 무가네에 다시 발을 들인 건지... 그나저나 무남천은 언제쯤 철수가 쓰레기ㅅㄲ인걸 알게 되려나. 너무 늦게 알면 미영에게 너무 미안해서 못 살 것 같은데. 이래저래 여전히 파란만장한 '며느라기'. 시즌2를 다 본 뒤에 한 번 더 리뷰를 쓰겠지만. 그때는 '그래도 무가네에서 살면 희망이 좀 보이네' 라는 말을 쓸... 수 있을까... 그럴 가능성이 없을 바엔, 다 탈출하고. 박기동씨도 밥충이 무남천을 떠나는 엔딩으로 끝을 보자. 물론 내가 말은 이렇게 했지만, 이런 삭막한 엔딩만을 원하는 사람은 아니니. 부디 시즌2 리뷰에선 무가네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마주할 수 있길 바라며.
★ 관람가능 OTT : 카카오TV, 왓챠 (2022.01) / 글쓴이 관람 OTT : 왓챠 (2022. 01)